인생의 의미 (타인의 욕망, 유한한 시간, 주체적 삶)
우리는 태어나서 12년 넘게 입시 위주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와서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일상을 보냅니다. 그런데 정작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뒤로 미뤄두고 있지 않나요? 인생을 다 살고 나서야 인생에 대해 공부하겠다는 태도는, 다시 구할 수 없는 소중한 물건을 설명서도 읽지 않고 마구 쓰다가 고장 나면 그때 가서 설명서를 펼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 역시 사회생활 초반에 이런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당신의 욕망은 정말 당신 것인가요?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인간의 욕망이 '삼각 구도(triangular desire)'를 따른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내가 어떤 대상을 직접 좋아해서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러워하거나 존경하는 타인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나도 욕망하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입사 3년차였을 때의 일입니다. 주변 친구들이 고가의 골프 채를 사고, SNS에 호화로운 해외여행 사진을 올리는 것을 보며 저 역시 그것이 성공의 증표인 양 착각했습니다. 정작 골프가 제 성향에 맞는 운동인지, 그 여행지가 정말 제가 가고 싶은 곳인지는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잘 나가는 사람들'이 하니까 저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한발 더 나아가 "욕망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욕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우리의 욕망은 애초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타인의 인정'이라는 끝없는 목표 앞에서 우리는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행복 방정식을 '소유 ÷ 욕망'으로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소유한 것이 아무리 많아도 욕망이 더 빠르게 커지면 행복 지수는 오히려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욕망을 조절할 수 있을까요? 심리학과 철학에서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 어떤 욕망이 일어나면 즉시 판단하지 말고, 그것이 나 자신의 필요에서 비롯된 것인지 타인의 것을 따라하고 싶은 마음에서 생긴 것인지 질문해보기
- 욕망을 좋거나 나쁘다고 단정 짓지 말고, 그 욕망을 실현할 것인지 어느 선에서 타협할 것인지 자제할 것인지 스스로 선택하기
- 정기적으로 나의 가치관과 우선순위를 점검하며, 외부의 기준이 아닌 내 기준으로 삶을 설계하기
이 과정만 거쳐도 무분별한 소비와 경쟁에서 벗어나 진짜 나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질문을 습관화한 뒤로 불필요한 지출이 눈에 띄게 줄었고, 무엇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0.0019초, 그게 당신의 인생입니다
천문학에 따르면 지구의 나이는 약 45억 년으로 추정됩니다. 이 45억 년을 24시간 하루로 비유하면, 현생 인류의 등장은 밤 11시 50분 59.808초입니다. 산업 혁명은 밤 11시 50분 59.995초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100년으로 친다면, 당신 개인의 삶은 그 24시간 중 약 0.0019초를 살다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수치를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솔직히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제가 그토록 집착했던 직급, 연봉, 남들 눈에 비치는 제 모습이 우주적 관점에서는 한없이 미미한 것이었다는 깨달음이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짧은 시간을 남의 기준에 맞춰 사느라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만약 당신이 영생한다고 가정해봅시다. 회사를 10년 다니든 100년 다니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맛있는 음식도 천만 번 먹을 수 있고, 하룻밤에 소주를 100병 마셔도 괜찮겠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과연 그 음식이 맛있게 느껴질까요? 모든 것이 지겨워질 겁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고 무한히 만날 수 있다면, 소중한 사람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집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 삶이 소중하고 의미 있는 건 그것이 유한하고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의미 없는 세상에 의미 없이 태어난 인간의 삶은 본래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말이 허무주의로 흘러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와 세상을 분리하지 않고, '나는 우주의 일부이며 내가 곧 우주'라는 진실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능동적인 의미 창조자가 될 수 있습니다(출처: 코리아헤럴드).
미래를 대비하는 건 필요하지만, 지나치게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현재 이 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따뜻한 커피 한잔 앞에 앉아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것, 공원을 걸으며 시시각각 변하는 석양을 감상하는 것, 가까운 사람과 산에 올라 계절마다 달라지는 자연을 느끼는 것. 이 모든 일에는 큰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 진짜 행복은 거창한 곳이 아니라 이런 사소한 순간에 숨어 있었습니다.
인생 설명서는 살기 전에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은퇴하고 시간 나면 철학이나 종교를 공부해봐야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앞뒤가 완전히 바뀐 태도입니다. 나의 본성은 무엇인지, 세계는 어떤 곳인지 먼저 알고 난 후에 인생을 설계하고 행동하는 것이 순리 아닐까요? 다시 구할 수 없는 소중한 물건을 설명서도 읽지 않고 마구잡이로 쓰다가 나중에 망가지면 그때 가서 설명서를 펼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의 도덕관, 미적 감각, 심지어 양심마저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습니다. 조선 시대만 해도 부모의 몸을 불에 태우는 건 극악무도한 불효로 여겨져 국가 차원에서 화장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2024년 대한민국의 화장률은 94%입니다. 미얀마 카렌족은 목이 긴 여자가 아름답다고 여겨 어린 나이부터 쇠고리로 목을 늘리는 고통을 감수합니다. 중국의 전족(纏足)은 여성의 발을 천으로 꽁꽁 묶어 성장을 멈추게 하는 풍습으로, 당시에는 이것이 미인의 조건이었습니다.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조차 "노예의 본성을 지닌 자가 지배를 받는 것은 오히려 본인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노예론을 펼쳤고, 현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겔도 "아시아는 문명의 시작일 뿐이고 유럽은 인류 문명의 종착지"라는 유럽 중심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지금 우리 관점에서 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이를 객관적 진리라 믿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기 의지대로 생각하고 자기 취향에 따라 느낀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속한 시대와 지역의 문화에서 벗어난 생각을 하거나 감정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경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 개인의 소득 중 50%는 그가 속한 국가가 만들어준 것이며, 30%는 부모나 환경이 만들어준 것이고, 20% 정도만 자신의 노력으로 이룬 것이라고 합니다. 환경을 배제한 나의 정체성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마치 푸른 하늘에 생긴 하얀 구름이 자기 모양에 도취되어 자신은 공기나 수증기와 관련 없는 독립된 존재라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주는 우리에게 조건 없는 백지수표를 주고 최장 100여 년 동안 원하는 대로 쓰라고 말합니다. 부과된 과제도, 짐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백지수표에 어떤 의미를 새겨 넣을 것인가입니다. 당신의 행위가 곧 우주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 타인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한 지출 대신, 조용한 공원을 걷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제게 주어진 시간을 저만의 색깔로 채워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한 번쯤 질문해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지금 추구하는 이것은 정말 내 욕망인가, 아니면 남의 욕망을 따라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서 주체적인 삶이 시작됩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vWG_ODIQIeY.png)